[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㉗] 3선 개헌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㉗] 3선 개헌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3.1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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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북한 무장특공대의 1.21청와대 습격에 대해서는 보복도 하지 못하고 끝났고, 1.23 푸에블로호 피랍 사태는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12.23), 피랍 과정에서 사망한 1명을 제외한 82명의 승조원 전원이 송환됨으로써 마무리된다.

1968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판문점을 통해 석방되고 있다.

푸에블로호 문제가 마무리되기 직전, 동해안 울진·삼척 지구에서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생포된 2명의 무장공비는 “1·21사태 이후의 대남공작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의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120명이 침투했다”고 말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李承福, 1959~1968)의 신화가 생겨난 바로 그 사건이다. 이 공비들의 침투로 우리 측에서는 6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승복(1959~1968)은 1968년 10월과 11월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한 북한 무장 게릴라들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가족과 함께 살해됐다. 그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태어나 속사초등학교 개방분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후 이 사건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초등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이후 일부에서 이 사실의 진실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장공비소탕 작전이 진행 중인 울진 삼척 지구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군지휘관(1968.11)

이듬해(1969)도 수월하게 지나가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의 마음속에는 ‘본인과 조국의 미래’와 관련한 큰 문제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3선 개헌(三選改憲)이다. 3선 개헌은 1967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와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잇는 징검다리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 대통령이 출마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3선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이 이뤄져야 하고, 그 개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화당이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67년 5월에 대선(제6대)이 끝나고 시작된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는 여·야 간에 ‘개헌 대 반(反)개헌’ 전선이 형성되면서 아주 치열하게 전개된다, 야당 신민당은 ‘통일 야당 밀어주고, 일당 독재 막아내자’를 선거구호를 채택했다. 당연히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며 유세 과정에서 줄곧 문제를 제기했다.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도 이 문제를 제기한다.

3선개헌과 관련해 김대중 의원은 목포선거 기간 중 박 정권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선거 기간에 대통령이 목포로 내려와 선거 지원하려 할 때 기자회견을 하고 공개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 신분에 있으면서 선거법을 위반해 가면서 부정선거를 하려는 것은 3선 개헌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그토록 무리하면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개헌이 목적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의혹을 밝히라! “그렇게 질문하자 이튿날 박 대통령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속내를 숨기면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김대중 후보의 발언은 언어도단이다. 나는 3선개헌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김옥두, 『다시, 김대중을 위하여』, 살림터, 1995)

6.8선거는 아주 혼탁하게 진행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회고다.

공화당이 저지르는 선거부정은 매일 끊이지 않고 신민당 중앙당사에 보고되었다. 그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서 마치 ‘부정선거는 이런 것이다’라는 표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6월 8일 투표일에는 전국 지구당에서 쉴 새 없이 보고가 들어왔다. 어느 후보자는 부정이 너무 심해 선거를 포기하겠다는 하소연도 해왔다. 공개투표, 대리투표, 환표, 무더기투표 등 투표과정에서 할 수 있는 부정투표는 모조리 동원돼, 일방적으로 공화당 후보를 감싸고 돌았다.(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 동아일보사, 1991)

세상이 묘한 것이 현직 대통령에 충성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몇 년 앞을 내다보고, 후계자를 주목하고 따르는 무리도 있게 마련이다. 당 안팎에서는 김종필이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아래위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사라지자(1968.6.5) 6인방(六人幇)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68년 말이 되자 박 대통령의 3연임을 위한 개헌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가만히 보니까 박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한 6인방은 이를 십분 이용해 자신들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들이 “각하가 아니면 안 됩니다”면서 나서서 추진한 것이 3선 개헌(三選改憲)이었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주)미래엔, 2016)

1967년 재선된 박 대통령은 3선개헌을 통해 1971년 제7대 대선에 출마할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5월 공화당 내 김종필을 따르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김종필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진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종필은 당 의장과 국회의원직을 내던지고 정계를 은퇴한다. 이것은 김종필의 1차 정계 은퇴 선언이었다. 김종필은 그 뒤에도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또 정계 은퇴를 하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출마해 10선을 이룩하려고 했으나, 패배하면서 세 번째 정계 은퇴를 한다. 이후 그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말을 남겼다.

김종필이 2016년에 펴낸 증언록에서 사용한 ‘6인방’이라는 말은 중국 문화혁명기에 나온 사인방(四人幇)에 빗대어, 당시 여권 내에서 자신에게 반대하고, 자신을 정계에서 몰아낸 6명의 권력자를 의미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박 대통령의 용인술을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 이른바 분할해서 통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권력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경쟁·감시하게 만들어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게 하는 용인술이라고 설명했다. 1965년 12월 공화당 총재이자 대통령인 박정희가 김종필을 당 의장으로 임명했으나, 당내에는 김성곤이 이끄는 4인 체제(백남억 당 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가, 당 밖에서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이 자리 잡고 이들이 협조와 경쟁을 반복하면서 ‘반 JP 공동전선’을 폈다고 회고했다. 친위부대이기도 한 이들 6인방은 김종필만 제거하면 권력의 2인자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제7대 대선이 끝난 뒤인 1971년 6월 개각에서 박정희는 김종필을 국무총리,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오치성은 김종필과 같은 육사 8기로 가까운 사이였다. 박정희는 1969년의 3선개헌 등에 앞장서면서 위세가 커진 공화당 내의 4인방을 견제하려고 개헌 포석을 했다. 몇 달 뒤인 10월 2일 야당이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자,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이들 4인방은 휘하 의원들에게 찬성표를 던지게 해, 해임건의안이 통과된다(10.2항명파동). 항명 파동의 주역 4명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하게 조사를 받고,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로써 공화당 내에서는 대통령의 의사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이후 박 대통령은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권력의 끝을 향해 질주한다.

당시 공화당은 무장공비의 침투 등으로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심리를 이용해 개헌 이야기를 흘렸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공화당 윤치영(尹致暎) 당 의장 서리가 깃발을 들었다(69.1.7).

사흘 뒤 박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 말을 받아서 “현행 헌법에 부분적으로 고쳐야 할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는다”는 사실상 개헌 입장을 밝혔다.

이미 공화당 4인 체제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8년 12월 정보부 삼청동 안가에서 당정연석회의를 열어 3선개헌을 추진하기로 각본을 다 짠 뒤였다. 6인방은 자신들이 앞장서 3선 개헌을 주장하고 나오면 반대에 부딪혀 꺾일 수 있다고 보고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를 앞세운 것이다. 그 내막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이거 야단났구나’라고 생각했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주)미래엔, 2016)

(왼쪽부터) 백남억(1914~2001), 김성곤(1913~1975), 김진만(1918~2006)
(왼쪽부터) 길재호(1923~1985), 김형욱(1925~1979), 이후락(1924~2009)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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