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아파야 깨닫는 것”
[안영수의 문화칼럼] “아파야 깨닫는 것”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6.10.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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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열흘 동안 목감기인줄 알았다. 처음에는 목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답답했다. 목감기 시초라고 생각하고 생강차, 쌍화차를 마시며 며칠을 보냈다. 목이 불편한 것 외에는 열도, 기침도 없어서 금세 회복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그런데 흉통이 오고 바튼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열도 없는데 웬일이람? 감기가 덧들려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된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에 겁이 났다.

며칠째 출근도 못했다. 목이 쉬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목이 많이 부었다며 주사 맞고 약을 닷새나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오늘 아침 딸의 권유로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는 성대 검사를 하더니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위산이 식도로 역류해서 성대와 후두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라고 한다. 어안이 벙벙해진다. 생각지도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가지고 집으로 오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 중랑천 산책로로 발길을 돌렸다. 어느새 가을이구나! 몇 십 년만의 무더위로 생전 올 것 같지 않던 가을이 온 줄도 몰랐다. 9월 말의 하늘은 파랗고 햇빛이 눈부시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가 미세먼지까지 씻어낸 공기가 투명하다. 오래된 나의 산책 코스이기는 하지만 해가 뜨기 전에 걷곤 하기 때문에 밝은 아침에 걷는 것이 얼마만인가? 비를 흠뻑 맞은 억새들이 한 곳으로 쏠려 누워있다. 그 위로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이 반짝거린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잡초 사이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는 씨앗을 잉태하고 스러지고 나뭇잎들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다.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쳐진 철책을 덮은 덩굴에는 갖가지 색깔의 나팔꽃들이 피어 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의 종류가 이렇게 많이 있었나? 빨간 봉숭아물을 들인 아기 손톱크기 만한 꽃부터 각각 크기가 다른 꽃들이 지천이다.

산책로에 만들어 놓은 아취 형 화단은 잡초와 나팔꽃, 그리고 야생화가 어우러진 그야말로 소박한 꽃 대궐이다. 노랑, 분홍, 자주, 흰색의 꽃들 위에서 흰 나비 한 마리가 희롱을 한다. 너무 아름다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모든 광경들을 새벽 산책길에는 그냥 지나쳤다니! 아니 어두워서 보지 못했다. 그날의 일정과 만날 사람들, 그리고 해야 할 업무 생각과 빨리 샤워하고 출근할 채비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둘러 산책을 하며 무더운 한 여름을 보냈다. 이 나이에도 일거리가 있고, 바쁜 일정을 소화할 만큼 건강하다는 자부심으로 거의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걸었던 내가 아닌가.

아침 10시인데도 동부 간선도로는 차들이 정체되고 있다. 마치 내 건강에도 경고등이 켜진 것처럼. 이럴 때는 원하지 않아도 멈추어야 한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이 들수록 몸이 나의 상전이다. 지금 나더러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명령한다. 그 나이에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앞만을 보고 달리느냐고 질책한다. 인대파열, 퇴행성관절염, 척추협착증에 이어 또 하나의 병명을 훈장처럼 몸에 달게 되었다. 한국인의 건강수명보다 10년은 더 살았으니 질병을 달고 사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다.

문제는 나이와 엇나가는 나의 욕심인 것 같다. 어쩌다 주어진 과분한 직책을 최선을 다 해 봉사하고 미련 없이 내려놓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런데 내면의 또 다른 내가 힐난하듯 묻는다. 아직도 너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건 아니냐고. 일에 대한 성취감으로 의기양양한 모습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욕망을.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고 아집과 교만에 찬 생활을 하다가 병에 걸리면 과거의 생활을 후회하고 회복하면 건강관리 잘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의 순기능도 있다. 누가 말했던가? ‘질병은 겸손해지는 경험(humbling experience)’이라고.

나도 식도염 때문에 나이를 잊고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앞으로만 달려가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청명한 아침에 산책을 하며 가을로 접어드는 자연의 변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언제 가을이 왔다 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인생이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라 했지.

문득 얼마 전에 읽은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책읽는 오두막, 정인모 편역, 2013)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헤세는 그의 서간집에서 “나이가 들수록 봄은 두려워지고 가을이 더 좋아집니다… 늙는다는 것은 마냥 시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마력, 지혜, 그리고 고유한 슬픔을 지니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헤세가 고백한 늙어서 얻어지는 ‘고유한 가치와 마력과 지혜’가 내게도 있을까? 나는 그가 얻은 지혜를 얻지 못했다. 여전히 욕망과 체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설익은 노인일 뿐이다. 일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욕심,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나이답지 않게 내장비만처럼 마음에 붙어 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경고(?)가 고맙다. 나를 새삼스럽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다시 헤세의 책을 펴서 밑줄을 그어 놓았던 ‘노년에 대하여’를 읽었다. 좀 길지만 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나처럼 나이 먹은 독자들을 위하여 인용한다.

“백발의 노년은 우리 인생의 한 과정이다. 다른 모든 과정처럼 그것만의 독특한 성격, 분위기, 열정, 희열 그리고 난관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하얀 우리 노인들도 젊은 친구들처럼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과업을 갖고 있다… 지금 노년의 정원에서는 전에 우리가 미처 가꾸지 못한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고귀한 인내의 꽃이 만발하면 우리는 더 여유로워지고 관대해질 것이다. 또한 직접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요구가 줄어들수록 자연과 같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더욱 관심 있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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